마산포교당 역사와...

이 금 숙 2022. 6. 19. 20:23

  마산포교당 역사와 경봉스님과 장지연 선생이 주고 받은 글

 

 

 마산포교당은 우리나라 포교당 역사에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포교당이다. 동래포교당, 수원포교당, 강릉포교당과 함께 한국불교의 포교의 새장을 여는 역할을 해 왔다. 조선 500년 동안 불교는 탄압 수준을 넘어 ‘말살’ 위기까지 내몰리기도 하였다. 사찰의 기둥이며 기와를 떼다가 유생들의 놀이터인 정자를 짓기도 하고, 묘를 쓰기 위해 사찰에 불을 지르는 경우도 있었다. 구한말 ‘승려 도성출입제한 조치’가 사라지면서 산중에 머물던 불교는 비로소 중생이 있는 저자거리로 나오게 됐다.

마산포교당 정법사는 일제시대 창건된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불교의 변화와 발전상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구한말 시작된 일본제국주의의 강탈은 조선시대 뿌리내린 유교중심의 사회체계를 한꺼번에 무너뜨렸다. 이런 가운데 불교의 자각 운동이 일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활동의 하나가 도심포교당 건립운동이다.

 

 민족의 독립을 이끌 인재를 길러내는 일은 시급한 문제였다. 또 극심한 가난에 빠진 민중을 어루만져야 하는 역할이 불교에 있었다. 이런 자각은 도심사찰 건립불사로 이어졌다.

 

                              1970년대 말 마산 포교당 법당 모습 (인물사진은 당시 주지 목산 스님)

 

 고려시대 이후 산중에만 머물러야 했던 불교는 도성 안에 사찰을 건립하고 도심포교를 시작했다. 도심의 중앙에 설립한 사찰이란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일제시대 진보적 사상을 가진 스님들이 주도한 도심포교당 건립 불사는 또한 중생 속에서, 중생과 함께 했던 불교의 본래 모습을 찾아가려는 움직임이기도 했다.

 

 마산포교당은 1911년에 법당을 완성하고 1912년 4월8일 통도사 마산포교당이라는 이름으로 마산시 추산동에 창건됐다. 당시 통도사 주지 구하스님이 “우리 민족이 일본의 식민지 백성으로 학대받고 있는 고초를 정법(正法)으로 구제하자”며 통도사의 논과 밭을 팔아 마산의 신마찌(新町)에 부지를 마련하여 지었다.

 

마산포교당이 위치한 추산동은 당시 일본식 명칭인 신마찌로 불렸다. ‘새로운 마을’이란 뜻처럼 일본인들이 다수 거주하며 신도시 개념으로 개발을 하던 곳이었다. 이곳의 야산을 매입해 산을 깎아 설법전을 세웠다. 1년간의 공사 끝에 사찰부지를 다지고 1911년 설법전을 신축했다. 그리고 이듬해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창건 행사를 갖고 포교활동을 시작했다.

 

 1922년 경성(서울)의 각황사에서 열린 전국 30본산 사찰 주지회의에서는 불교진흥회를 조직했으며, 뒤이어 위암 장지연이 마산에서 마산불교진흥회를 조직했다. 일제의 국권강탈에 맞서 ‘시일야 방성대곡’을 신문에 게재하기도 했던 장지연은 마산포교당을 중심으로 민족 자각 운동을 전개했다. 항일운동가, 민족주의자들이 자연스럽게 마산포교당에 모여들었다. 또한 미술, 문학, 연극인들도 마산포교당을 중심으로 신행과 창작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당시 마산에 포교당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본불교계에서 마산에 흥법사, 복수사 등 6개의 사찰을 건립했지만, 조선의 불자들은 일본사찰을 배척하고 마산포교당으로 모여 든 것이다.

 

 <간추린 마산역사>(이학렬 엮음, 경남 출판)에서는 “1902년 이후 일본 절이 세워져 일본인을 상대로 포교활동을 펴고 한편으로는 조선인 신도들을 끌어들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조선인 신도들은 일본불교는 이질적 불교로 받아들였고, 한 맺힌 항일감정이 겹쳐져 일본불교를 배척했다. 마산에서 근대불교가 시작된 시점은 마산포교당이 건립된 1912년으로 보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경남지역에서 마산포교당의 위치를 잘 설명하고 있는 대목이다.

 

민족 자각과 포교라는 기치에 맞춰 마산포교당은 1927년 4월12일 배달유치원(현 대자유치원)을 설립했다. 강릉포교당이 설립한 금천유치원에 이어 ‘불교계 2호 유치원’으로 기록된 대자유치원은 90 여년 동안  만 수천 여명의 원생을 배출하며 지역 어린이 교육의 산실로 자리매김해 왔다.

 

                                       1928년 배달유치원(현 대자유치원) 첫 졸업식 모습.

 

   마산포교당은 설립목표를 잃지 않고 꿋꿋이 중생과 함께 고난의 시간을 헤쳐왔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나라가 독립이 됐다. 하지만 마산에 남은 것은 일본인들이 두고 떠난 빈껍데기뿐이었다. 공장을 운영할 원료도, 기술자도 없었고, 식량도 바닥이 났다. 강제징역에 끌려갔다가 해방을 맞아 현해탄을 건너 조국에 돌아온 사람들은 마산포교당 바로 앞에 위치한 부림시장으로 몰려들었다.

 

   <간추린 마산 역사>에는 “귀환 동포들은 함석지붕을 이은 나무로 된 점포들이 줄지어 서 있는 부림시장 주변의 길거리에서 노점을 차려놓고 삶을 이었다. 혹은 진해에 있던 일본 해군의 지하창고에서 흘러나온 여러가지 물건을 구해 길거리에서 팔기도 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삶에 지친 사람들은 자연히 시장에 위치한 마산포교당을 찾았다. 포교당은 빈민들이 잠시 고된 삶을 놓고 쉬는 휴식터로, 그들과 함께 고난의 시간을 헤쳐왔다.

 

 6.25전쟁이 반발하자 마산포교당 인근은 피난민들의 거주지로 변모했다. 3만명이던 마산의 인구는 1953년에 13만명을 넘어섰다. 사찰이 위치한 뒷산은 판자집이 하나 둘 생기더니, 금세 마을을 이뤘다. 그 모두가 마산포교당이 감싸 안아야 하는 ‘중생’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건물 불사는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다. 일제시대 민족운동에서, 해방 후 부림시장 등지에서 일하는 귀환 동포들의 휴식처로, 전쟁 이후에는 집과 고향을 잃은 사람들을 보듬어야 하는, 그야말로 중생 속에서 살아야 하는 ‘포교당’이었다. 그러던 차에 이번에는 정화의 바람이 불어왔다. 마산포교당의 본찰인 통도사가 정화운동의 중심에 서면서 마산포교당은 사찰 부지의 일부를 팔아 정화운동기금을 마련해야 했다. 1952년에 시작된 정화운동은 10년간 지속됐다. 특히 마산지역은 1990년 3월 마산 · 창원 불교연합회가 조직되기 전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 대립으로 불교계의 단합이 이뤄지지 않았다. 이런 속에서 마산포교당은 2600여 ㎡(약 800평) 부지에 법당과 작은 요사채만 갖춘 사찰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마산포교당에는 ‘탄탄한 신도층’이 있었다. 유치원에서 학생회, 청년회, 거사림회, 직장직능단체 등 중장년층을 아우르는 다양한 신도단체는 마산포교당을 다시 일으켜 세울 기반이었다.

 

                                           경봉스님이 마산포교당에 주지로 있을 때 쓴 글 

 

 

 海曇律師 奉別 韻

 

 同居 安養庵 馬山 布敎師 發日 丁巳年 1月19日

 

경봉선사께서 마산포교당에 포교사로 丁巳는 1월 19일 발령 나자 해담율사께서 해어짐을 서운케 생각하여 쓴 시.

 

 奉別봉별 韻운

 

이 암자에 머물려 고락을 함께 겪으며

불문의 오묘한 이치 스님과 담론 했네

인연 따라 가시는 길 멀리서 바라보니

구름은 희고 산은 푸른데 달이 못에 담겼네.

 

 海曇律師 答和답화 如左여좌

 

비록 서로 떠나 천리밖에 살지만

취향이 같으니 한방에 앉아 이야기하는 듯

누가 봄바람에 춤을 추는 듯 하는 곳에

산은 만층 봉우리요 물은 만 연못임을 알랴

 

 馬山 布敎堂 丁巳 2月 9日 馬山 布敎師 在 時

 

 경봉선사께서 마산 포교당에 계실 때 쓴 시.

 

우담바라 꽃 핀지가 몇 해나 되었나

창생을 제도하여 세상을 경계 하네

사자후 하는 바위 앞에 푸른 뫼가 우뚝하고

용이 우짖는 바다위에 흰 구름 떳네

 

보배 칼날 찬란하니 마음에 두려움 없고

지혜의 달이 영롱하니 흥이 사라지지 않네

하늘 같이 높은 濁浪탁랑 뉘라서 헤어나겠나

야밤중 해가 떠서 강가에 내려오네.

 

 張志淵居士 元韻 장지연거사께서 경봉선사님께 올린 시

 

합포성 서쪽 학령엔 가을이 오네

포교당 높이 짓고 선원을 열었네

하늘가 산봉우리 물위에 어리네

깜박이는 등 스러지는 향연

 

스님은 定정에 들고 범종소리

그치자 객의 꿈이 깨었네

둥글고 둥근 동방의 밝은 달

우담화 피듯 오대주를 두루 비추소서.

 

 贈別 韻

 

 馬山布敎師 辭免內院寺住持被任 相別時 己未年 孟秋

 

기미년 가을이 한창일 때 마산포교사를

그만두고 내원사주지로 被任피임 되면서 지은 시.

 

보은의 한 탑 사람의 정성으로 이루어

천추 만대에 기념하는 그 뜻 감격 하네

關樹관수에 구름이 머물려 전별의 뜻 표하는 듯

기차가 길을 재촉 한다만 나 홀로 어이 가리

 

올 때는 봄바람이 좋아 불더니

떠난 후엔 바다의 달처럼 서로 생각하리

불법에 공덕 심으면 음덕이 쌓이는 것

서로 전하는 입 비석에 그 이름 영원하리.

 

 又

 

보은의 탑 세우니 人. 天이 찬양 하네

향연 풍길 제 종소리 은은하고

모두 함께 불법 쌓고 작별하니

오늘 밤 비창한 달 海中峰해중봉에 걸렸어라.

 

 嵩陽居士 韋庵 張志淵 和贈曰 鏡峰尊師 歸 內院庵 井小序

 

 숭양거사 위암 장지연님이 내원암으로 가실 경봉선사님께 올린 시

 

경봉선사는 통도사의 큰 스님이다.

그 성품은 단아하고 학식이

해박하여 시 잘 짓고 글씨

잘 쓰며 유가의 선비와 어울려

놀기를 좋아하니 대게 해원과

영철과 같은 분이다

 

마산 포교당에 와 머물면서

설법하고 계행을 지키니

모든 선남선녀의 신도들이

신행하고 귀의하여 계를

받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래서 큰 원력과 큰 자비심을

일으켜 심력을 아울려 기쁘게

보시하여서 돌을 쌓아 탑을

만들고 장경을 각하여서 기념하였다.

 

이 포교당에서 스님의

공덕은 헤아릴 수가 없다 하겠으며

선남선녀의 정진하는 이가 더욱 많아졌다.

 

나도 또한 스님의 오묘한 견해와

정진 뚜렷하면서도 맑고 담박함을

좋아해서 법석에 임하여 법문을

들은 지 여러 해가 되었다

 

이제 스님께서 만기가 되어 장차

양산의 내원암으로 옮기어

주석하게 되니 스님께서 몸소

시 한편을 지어 내게 정의를 표하였다

 

내가 알기로는 산승의 甁鉢병발은

뜬구름과 흐르는 물 같아서

머무름도 없고 집착함도 없고

감도 없고 옴도 없는 것이나

 

그러나 그가 감에 있어 어찌

서글픈 정이 없으랴 더구나 스님께서

먼저 瓊章경장을 주었음에랴.

이에 그 운으로서 和贈화정하노라.

 

높고 높은 공덕 탑은 정성을

표현했고 석면에 장경 새김

믿음의 뜻이 있네 拈花염화하심

매번 즐거워 법회에 임했는데

 

뜻밖에도 석장 날려 산에

들어가시네. 재 넘어 구름은 멀리

영축산처럼 어두운데 바다 달은

뜻이 있어 보배 거울처럼 비추네

 

내년에 숲속에 딸기 익으면

예 놀던 바위 위에 다시 이름 써 보세.

 

                       

                                          위암 장지연

 

  장지연 [張志淵, 1864.11.30~1920.10.2] 본관 인동(仁同) 호 위암(韋庵) ·숭양산인(嵩陽山人) 별칭 초명 지윤(志尹), 자 순소(舜韶) 활동분야 언론 출생지 경북 상주 주요수상 대한민국건국훈장 국민장(1962) 주요저서 《위암문고》 《대동문수》 주요작품 〈시일야 방성대곡〉(1905) 본관 인동(仁同). 호 위암(韋庵)·숭양산인(嵩陽山人). 초명 지윤(志尹). 자 순소(舜韶). 경북 상주(尙州) 출생. 1894년(고종 31) 진사(進士)가 되고, 이듬해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명성황후가 시해(弑害)되자 의병의 궐기를 호소하는 격문(檄文)을 각처에 발송하고, 1897년 아관파천(俄館播遷) 때 고종의 환궁(還宮)을 요청하는 만인소(萬人疏)를 기초하였다. 이 해 사례소(史禮所) 직원으로 《대한예전(大韓禮典)》 편찬에 참여, 이듬해 내부주사(內部主事)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이승만(李承晩)·남궁 억(南宮檍)·양흥묵(梁興默) 등과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열어 총무위원으로서 정부의 실정을 규탄하였다. 1899년 《시사총보(時事叢報)》의 주필로 항일구국(抗日救國)의 필봉을 휘둘렀으며, 한때 사직하고 광문사(廣文社)를 설립,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 등을 간행, 1901년 황성신문사 사장이 되어 민중계몽과 자립정신 고취에 전력을 다하였다. 1905년(광무 9)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11월 20일자 《황성신문》에 〈시일야 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사설을 써서 일본의 흉계를 통박하고 그 사실을 전국민에게 알렸다. 이로 인해 일본 관헌에 잡혀 3개월간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정부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기용하였으나 거절하고, 물러나 역대 문헌의 수집과 저술에 힘썼다. 1906년 윤효정(尹孝定) 등과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 구국운동을 벌이다가 이듬해 강제로 해산을 당하자 대한협회(大韓協會)로 개편하였으나, 압력이 심하여 1908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 《해조신문(海潮新聞)》 주필이 되었다. 경영난으로 신문이 폐간되자 상하이[上海]·난징[南京] 등지를 방랑하다가 귀국, 1909년 진주(晉州) 《경남일보(慶南日報)》 주필로 취임, 이듬해 8월 29일 국권침탈이 되던 날 황현(黃玹)의 절명시(絶命詩)를 게재, 이로 인하여 《경남일보》는 폐간되었다. 저서에 《유교연원(儒敎淵源)》《동국유사(東國類史)》 《대동시선(大東詩選)》 《농정전서(農政全書)》《일사유사(逸士遺事)》 《위암문고(韋庵文庫)》 《대한최근사(大韓最近史)》 《대동문수(大東文粹)》 《대동기년(大東紀年)》 《화원지(花園誌)》 등이 있다. 1962년 대한민국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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